마음의 안식처를 찾아서 <10> 파주 용상사(龍床寺). 고려 현종이 세운 천년고찰
수정 : 2021-06-28 02:54:23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서 <10>
파주 용상사(龍床寺). 고려 현종이 세운 천년고찰
대승, 소승불교를 아우르는 회삼귀일, 삿된 것을 바로잡는 파사현정의 가르침
용상사 입구가 수목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일주문을 지나 이내 언덕을 올라가니 탁 트인 시야가 펼쳐진다. 찬란한 신록의 잎새들이 시원한 봄바람에 파도치며 몸을 뒤집는 멋진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 신선한 모습에 시선이 한참을 머물렀다.
고려 현종이 피신했던 곳
천년고찰 용상사의 유래는 이렇다. 1018년 40만 거란이 개경까지 침입하자 고려 현종은 난을 피해 민복차림으로 파주 월롱산으로 피신했다. 다행히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승리하여 국내가 평정되자 환궁했다. 현종은 피신했던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절을 짓고 왕이 머물렀다 하여 용상사(龍床寺)로 명명했다.
세종때 조성한 파주용상사석불좌상
1445년(세종27년)에 덕은화주(德隱化主)스님이 소불석상(小佛石象)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석상좌면에 기록되어있다. 이 소불석상은 높이 56.5센티, 무릎폭이 44.5센티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280호로 지정되면서 파주용상사석불좌상이 공식명칭이 되었다. 조선초기의 불상양식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들이 이 절에서 머물면서 왜구들을 용상골에서 섬멸했다 한다. 왜군들의 시체가 계곡에 가득 차 이 일대를 무덤골로 부르기도 했다.
5백여년간 벽장굴에 모셔져있던 소불석상은 해방 전 폐사지에 작은 암자를 짓고 옮겨졌다. 협소한 암자를 여법한 도량으로 중창불사 하는 중, 2015년 11월에 새로 지은 대웅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되면서 석불좌상 표면이 방납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주지 문수스님 “우리의 삶이 부처님 도량이다”
현재 용상사의 주지는 문수스님(文秀스님, 60세)으로, 30세부터 현재까지 근 30여 년간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과 명부전 삼성각을 중수하고 천년고찰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모태 불자다. 스님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을 떠나 파주로 이주했다. 이어 문산중과 문산 종합고등학교를 나와 방통대에서 문화교양을 공부했다. 전공 때문인지 대화중 스님의 지적공력 또한 상당히 높다는 느낌이 전해온다.
대뜸 그는 법화경에 나오는 심우도(尋牛圖)를 언급한다. 처음엔 도를 상징하는 소를 찾아 나서지만 결국에는 본래의 나로 돌아와 도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심우도를 예로 들며 ‘출가(出家), 재가(在家)’의 분리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계(戒)를 받았다. 어릴 때 출가했다는 뜻의 동진출가(童眞出家)한 것이다.
솔직한 표현에 눈빛이 형형하고 주관이 뚜렷한 느낌의 문수스님은 “우리의 삶이 부처님 도량이다”라고 설파한다. “인식이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상황을 바로보고 여래의 가르침인 탐 진 치의 3독으로부터 벗어나고 대 자유를 깨우치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며 신행의 전부라고 말한다. 문수스님은 “불교는 편협될 수 없는 가르침이기에 편협하다면 불교가 아니다. 소승과 대승을 구분하여 불교를 고착화 시키고 싶지 않다”는 소신을 밝혔다.
대한불교 일승종(一乘宗)의 정신 잇는 용상사
이 같은 그의 생각은 용상사가 대한불교 일승종(一乘宗)에 속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승종은 1969년 성북동에 있던 일승사(一乘寺)의 최혜정(崔惠正)스님이 창종했으며 법화사상계에 속한다. 종지(宗旨:근본 뜻)는 회삼귀일(會三歸一, 소승과 대승이 모여 하나로 돌아온다)과 파사현정(破邪顯正, 치우치거나 잘못된 것을 고쳐 바른 것이 드러나게 하는 것)의 보살도를 가르치는 현대불교종파다. 그만큼 기존 불교의 틀을 넘어서는 참신함이 있다. 스님은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기주의나 자본주의 논리에 잠식되어 헤어나지 못함에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특히 집단일수록 기득권 성향은 강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사회에 기여하는 조직으로 공존조화의 기능이 아니라 기득권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까지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님으로 삶은 나에겐 즐거운 숙명이다.
처음엔 숙명인 된 스님이란 삶이 뭔지 모르고 불편하다고만 생각하였지만, 공부를 해가며 “나를 깨우치고 주변을 개혁하고, 어두움 속에 빛을 전해주는 너무나 훌륭한 전법 행”이라는 알아챔의 전환이 있었다고 말했다. 스님은 또한 위정자, 언론인들 등에 대해 따끔한 비판을 가한다.
“본질을 망각한 상업주의에 매몰된 언론이나, 집단 혹은 개인이기주의 정치가 민중을 기망하고 있다. 또한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의 완장 질, 전문지식집단의 이기적 횡포 등으로 전방위적인 혼돈이 이 사회에 만연하다. 비교하자면, 장마당 한 구석에 한무더기의 어린아이의 배설을 혼자 먹겠다고 엉키어 싸우는 개판”이라고 돌직구를 날린 문수스님은 “모든 정치와 언론과 지식행위는 민중들을 위해야 하며 민중들 위에 군림하려는 모든 작태를 배척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신다. 결국 민중이 있어야 그들이 있는 것 아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조직이 아니라 개인들의 개혁정신이다.
문수 스님은 “이젠 탈종교, 탈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오고 있다. 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는 조직이 아니라 각 개인들의 개혁정신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사찰마다 있는 흔한 조직도 만들지 않았다. 조직이 있다면 궂은일 살림살이 신도회 격인 ‘관음회’ 하나다. 정기법회도 매월 3번째 일요일 한 번이다. 절의 큰 행사가 다가오면 DM을 발송할 뿐 참석을 종용하는 전화 같은 건 없다. 그러니 절의 살림은 넉넉지 않은 것 같다. 화재 이후 급히 대적광전을 복원해 놓고는 단청은 천천히 하려한다고 말씀했다.
스님은 늘 당당하다. 스님은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더불어 상호존재하며, 스스로를 위해서 현명한 이타심과 이타행을 해야 한다. 사찰에서 승려는 수행, 불사와 포교, 전법을 위해 성심성의를 다해야 한다”말하고 “그게 지금까지 근 40여년 가까이 이 절을 수호하고 있는 이유”라고 밝혔다. 문수스님은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상호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말세가 오는 법”이라고 주장한다. 이어 스님은 “지금 우리에게는 열려있는 개혁의 문이 보이고 기회가 있다. 어리석음을 떠나 한 마음을 바꾸면 알게 되고, 알면 개혁 된다”라고 말했다. 스님의 마무리 말이 사자후(師子吼)같이 느껴졌다.
용상사: 파주시 용상골길 403
전화 031 945 4489
#1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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